성도지 보드가야(Bodhgaya)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보드가야는 가야읍에서 10km 떨어진 한적한 시골이다.

당시 이곳 가야지방은 성스런 땅으로 많은 수행자들이 몰려 수행하였다. 보드가야 대탑이 보이는 니련선하 건너편 우르빌라 苦行林에는 약 2만명의 수행자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카샤파 3형제와, 우르빌라 가섭과 그의 제자들도 이 곳에서 수행을 하였다고 전한다.

보드가야라는 지명은 부처님이 성불하신 곳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불교의 성지이자 힌두교의 비쉬니 및 브라흐마의 성지로 추앙되어 현재에도 많은 힌두교도들의 수행과 참배가 이루어지며, 조상 공양의 성지로 조령제를 올리는 곳이다.

현재 보드가야 대탑은 힌두교도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어 아쉬움이 있으나, 인도전역이 힌두교도가 대다수이고 불교에 대한 배타성이 없어 현실적인 대안으로 유지되고 있다.

 

석존의 고행수도와 깨달음

최고의 수도자인 두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던 싯달타는 자기 자신의 실존적과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당시 일반화된 수행인 고행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하였다

고행을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원어 타파스(Tapas)는 열()을 뜻하는 말로 고행을 통하여 신체에 열이 축적되며 그 열의 힘에 의해 목적하는 일이 성취된다고 믿었다.

당시 인도에서 고행 수행법이 많이 행해진 이유는, 사람의 마음은 원래 청정하나 육신이 장애가 되어 욕망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육체에 극단의 고통을 주어 정신을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였다. 힌두교의 최고인 브라흐만도 고행에 의한 열로 우주창조와 모든 세계가 생겼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르빌라 고행림에 자리한 싯달타는 하루에 한끼, 일주일에 한끼로 점차 식사 량을 줄여, 하루에 쌀 한 톨과 깨 한 톨씩만 먹고 정진에만 몰두하는 안아반아(ana pana )수행하였다.

싯달타의 고행이 너무 혹독하여 신체는 80세 노인과 같았으며 등뼈는 굽어 일어서려면 네발로 기어야 하고 앉으려면 뒤로 벌렁 자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걱정한 天人들이 털구멍으로 영양분을 주입하려 하자 이마저도 거부하였다고 한다

석존의 부친 숫도다나왕은 싯달타의 고행을 크게 슬퍼하였고, 궁중의 시녀들도 석존을 따라 하루 한 알의 삼씨,,콩 등만을 먹는 단식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지식선(止息禪)과 단식으로 6-7년간을 수행하던 싯달타는 육체의 무의미한 괴롭힘이 정각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깨닫고 고행단식을 중단하였다.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한 싯달타는 고 세나마을의 장자의 딸 수자타가 공양한 우유죽(파야사)를먹고 기력을 회복하였다.

(과거 인도에는 심한 탈진 상태의 회복에 우유 죽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당서역기에는 목축을 하는 두 여자의 옛 집터와 우유 죽을 끓인 장소를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우유 죽 공양에는 여러 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행을 멈춘 싯달타를 보고 함께 수행하던 교진여등 다섯 동료는 싯달타가 타락했다고 비난하고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떠나버렸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은 싯달타는 보리수 아래 길상초를 깔고 수행정진 하였다. 이윽고 인도력2(바이샤카월/한역에는 28)16일 새벽,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유혹(악마.마왕)을 극복하여 마침내 無明이 소멸하고 흔들림 없는 正覺을 얻어 붓다(Buddha)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솟아오르는 법열의 기쁨을 소리높여 외쳤다아 번뇌는 모두 사라졌도다!”

정각을 얻으신 후 부처님께서는 7.7일 동안 보리수와 부근에서 경행 하시거나 선정에 들며 깨달음을 음미 정리 하셨는데 이 때도 악마의 유혹이 있었으리 만큼, 깨달음의 어려움은 크고도 험난한 길이였다.

 

보드가야 유적과 간략사

부다가야 대탑은 화구르강 지류인 나이란자나 강 언덕 가까운 곳에 있으며, 높이는 50M

로 동쪽을 향하고 있다.

4면에는 많은 감실과 꽃잎과 초목 등이 조각이 되어있으며,내부는 중앙에 부처님(항마인의 불상) 을 봉안 하였고, 계단을 통하여 2층으로 오를 수 있다.

현재의 불상은 13세기 경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초의 불상은 약 6개월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대당서역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대좌높이가 42촌 넓이 125촌 상의 높이는 115촌 양무릎 거리가 88촌이며 양 어깨는 62촌 크기로 조성되었다

2층에 올라서면 동쪽 중앙으로 감실 안에 불상이 모셔져 있고 4면에 대탑 모양의 약간 큰 스투파 벽면 및 주위에 크고 작은 조각이 조성되어 있다.

1880년 고고학자 컨닝험의 발굴 당시는 대탑 하단부가 모래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성도지 사원 건립은 부처님 성도 250여 년 후 이곳을 순례한 아쇼카왕이 금강좌 자리에 사원을 건립하고 석주를 세워 기록을 남겼다.

그 후 여러 차례 증수와 보수가 이루어 졌으나 직접적인 자료들이 없어 정확한 기록은 알 수가 없다.

보드가야 대탑(마하보디사원) 원래 목적은 불상과 금강보좌를 수용하기 위한 사당의 기능으로 지어졌으며, 언제쯤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AD 637년 이곳을 방문한 현장은 보리수 동쪽에 정사가 있다. 높이가 160~170척이되고, 아래의 기단 넓이는 20여보가 된다. 푸른 기와로 쌓고 나서 그 위에 석회를 발랐다. 여러 층의 감실은 모두 金像이 모셔져 있고 사방의 벽에는 진귀한 조각이 마치 염주를 이어 놓은 것처럼 보이며, 정사 위에는 금동제 아마라카과(보물단지)를 놓았다. 정사 동쪽에는 중각(重閣)이 건조되어 있다........ 외문 좌우에는 각기 감으로 된 방이 있은데 왼쪽에는 관자재보살 상이 오른쪽에는 자씨보살 상이 있다. 백은으로 주조되어 있는데 높이는 10여 척 된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이보다 200여년 앞서 이곳을 방문한(AD409) 법현은 탑을 짓고 상을 만든 것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 간략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법현이 현재의 대탑을 보았다면 웅장한 규모에 대하여 좀더 자세한 기록을 했을 것이다.

즉 현재의 대탑은 법현이 다녀간 이후 현장이 방문하기 전 5C-7C 사이에 굽타왕조때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탑은 스리랑카와 미얀마 왕에 의해 몇차례 보수된 적이 있으며, 현장의 기록에도 싱할리국(지금의 스리랑카)의 승려가 많다고 기술하고 있다.

동쪽입구를 제외하고 3면에 난간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기원전 1세기 경 인도 크랑기와 나가데비 왕비가 세운 난간과 5세기경 굽타왕조가 세운 난간이 있다.

전자는 사암으로 만든 석주로 불타의 전생화, 수자타 장자의 보시 등이 새겨져 있고, 후자는 화강암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주로 화환 백조 등이 새겨져 있어 이 때에 대규모 증축공사가 이루어 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의 난간은 다시 제작된 것으로 원본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

대탑의 북쪽 뒷면에 금강보좌와 보리수나무가 있으며, 그 옆쪽으로 부처님께서 성도직후 깨달음을 즐기면서 산책하던 곳에 연꽃이 피어난 자리가 있다.

 

금강보좌는 서쪽 보리수 옆에 위치하고 있다.

컨닝험은 대탑의 수리중 서쪽벽 밑에서 회색사암으로 된 금강보좌를 발견하였는데 표면은 기하학적무늬가 있고, 측면은 비둘기, , 잎새, 오리 등이 조각과 초기 브라흐마 문자로 보좌헌납 기록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약간 더 서쪽에 있는 아쇼카 왕의 정사 안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한다.

현장의 기록에는 "보리수를 둘러싼 담장 한가운데 금강좌가 있다.

三千大天世界안에 자리잡아 아래로는 금륜(金輪)에 이르고 위로는 지면에 나타났다.

현겹중에 千佛이 여기에 앉아 금강정에 들어 금강좌라 하고 깨달음을 연 곳이기에

보리도량이라 한다.............‘부처님 열반후 두 개의 관자재보살을 동향으로 안치하였는데 옛 선인이 말하기를 이보살상이 묻혀 보이지 않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한 것이다.’ 라는 것이다 지금은 남쪽 귀퉁이 보살이 묻힌 것이 가슴을 넘을 정도다.“

금강보좌 옆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첫 발을 내디디신 곳에 한쌍의 불족적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앞에 좀 더 큰 1개의 족적이 새겨져 있는데 비쉬니 신의 족적이다.

힌두교에서는 부처님이 비쉬니 신의 9번째 화신에 해당된다.

흥미로운 점은 부처님 족적에 새겨진 물고기 문양이다.

가야 지명과 같은 우리나라 가야와 김수로 왕릉에 새겨진 물고기문양(비쉬니의 5번째 화신)에서 양 지역 간의 연관성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중이다.

보리수의 성쇠

현재의 보리수는 부처님 당시의 손자 뻘 되는 나무라 한다.

BC3세기경 아쇼카왕의 딸 상가미타가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보리수의 어린 묘목을 옮겨 심었는데 이교도에 의해 잘려진 자리에 스리랑카에서 다시 옮겨 심었으며, 현재의 나무는 1879년 폭풍으로 쓰러진 고목의 뿌리에서 돋아난 싹이 자란 것이다.

아쇼카왕은 처음 즉위 시 사도를 신앙하여 유적을 파괴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보리수를 베어

쌓아 바라문에게 불지르게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불 꽂이 가라앉기도 전에 두 개의 나무가 솟아올라 잎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 이를 회보리수라 한다)

아쇼카왕이 놀라고 후회하여 향유를 뿌리에 뿌렸더니 이튿날 아침 나무는 본래대로 되었다.

왕이 기뻐하며 여러 날 공양을 올렸는데 사도를 믿는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보리수를 베어버렸다. 왕이 아침에 예배 드리려 갔으나 그루터기만 남아 있었다. 아쇼카왕이 정성을 다하여 기도드리고 향유를 뿌렸더니 그 날 날리 저물기 전에 본래의 모습으로 자라났다.

왕이 돌로서 담장을 두르고 나무를 보호하였는데 높이가 10여 척 이였다.

그 후 6세기경 사상카왕이 불교를 배격하여 사원을 파괴하고 보리수 뿌리까지 자르고 그 자리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수개월 후 아쇼카왕의 말손(末孫)인 마가다왕국의 푸르나바르만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불타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시고 나무만 남았는데 이 나무까지 잘라버리면 중생은 무엇을 보아야 한단 말인가하고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한다.

왕이 수천 마리의 소젖을 짜서 뿌리에 뿌렸더니 하룻밤이 지나자 나무가 되살아났으며 ,후세 사람들이 다시 벌체할까 염려하여 주위를 24척 되는 돌담을 둘러쌓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