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석굴 제17굴

 돈황제17굴

 둔황석굴제17굴 - 행운이 따라줘 선명하게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굴되었다.
 지금은 보관되었던 중국도 혜초스님의 고향인 한국도 아닌 먼나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져 있다.

 당시 폴펠리오의 발굴사진
 촛불에 의지하여 신중하게 문서를 분리하는 모습과 모굴이 16굴에 분리한 문서들을 옮겨놓은 모습 

    
돈황제16굴

돈황제16굴 -17굴의 모굴로 당시의 사진과 비교하면 우측의 2개 소조상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펠리오가 문서를꺼내 분류하던 당시의 사진과 현재모습>

       왕오천축국전원본
    <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 좌측은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중인 진본사진 >

왕오천축국전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 중국식 옛 이름이다.

앞뒤가 잘려나간 현존 여행기에는 중천축에서 시작하여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과 인도의 서쪽에 있던 대식국(아랍)까지 갔다가, 중앙아시아 주위를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 영토인 쿠차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에서 승려 혜초는 보고 듣은 것을 기록했다.

대체로 나라 단위로 서술하고 있으며, 출발한 나라에서 목적한 나라로 가는 방향과 걸리는 시간, 왕성의 위치와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 음식과 의상, 풍습, 언어, 종교 등에 대해 간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혜초의 여행기는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우리 책이자 8세기 전반기의 인도 불교의 상황을 전해주며 지금의 캐시미르파키스탄아프카니스탄페르시아터어키중앙아시아 등의 풍속지리역사 등을 알려주는 등 서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다른 것과 비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19083월에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며 탐험가인 폴 펠리오

(p.pelliot)는 중국 감숙성 돈황 천불동에서 필사본의 각종 경전을 비롯하여 고문서불화 등 값진 문화재 29상자를 꺼냈다.

그는 그것들을 프랑스로 가져가 곧 연구에 착수하여, 정리 조사하던 중 앞 뒤가 잘려진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 하나를 발견했다.

제명도 저자명도 없이 겨우 230줄에, 한 줄은 30자 내외, 6천여 글자에 불과한 짤막한 글이었다.

그는 그 내용을 검토해 보고 인도방면을 여행한 구도승의 기행문임을 알았다.
그는 전부터 이용하던 당나라 스님 혜림이 지은 <일체경음의> 100권 속에 있는 <혜초 왕 오천축국전>에 보이는 낱말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간파, 곧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없어진 줄로만 알고 있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임에 틀림없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이러한 발표가 있자 다음해인 1909년에는 청나라 학자 나진옥이 그의 <돈황석실유서> 1책 속에 이것을 영인해 넣어 교록찰기를 붙여 잘못을 바로잡고 설명을 붙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일체경음의>에 나오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절략본이라고 단정했다.

그렇게 하여 이 책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세인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그 뒤 1911년에 일본인 학자 후지다는 나진옥의 영인본을 기초로 하여, 법현의 <불국기>, 송운의 <행천축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의정의 남해기귀전 등 인도 기행문을 비롯하여 신당서구당서 등 여러 역사서와 서양 학자들의 연구물까지 두루 참조해서 본격적으로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서인 <혜초 왕오천축국전 전석>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작자 혜초에 대해선 중국인 스님이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1915년에 일본인 학자 다카스키가 <혜초전고>를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혜초가 중국인 스님이 아니고 우리 신라의 스님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 후 부분적인 연구가 여러 학자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나, 또 하나 두드러진 일은 1938년에 독일의 동양학자 푹스(W.Fuchs)가 이 <왕오천축국전>을 독일어로 번역해 냈는데, 이것이 <왕오천축국전>의 최초의 번역본이다.

이렇게 국외에서 이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연구 내지는 번역이 활발해지자, 국내에서는 1943년 최남선이 삼국유사 부록에다 그 원문을 싣고 간단한 해제를 붙여 발행함으로써 쉽게 원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최남선은 그 해제에서 법현의 <불국기>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오고 현장의 <서역기>는 육지로 갔다 육지로 돌아온 기록이며, 의정부 <남해기귀전>은 바다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온 기록인데 대하여 이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돌아왔다는 점에 특생이 있다고 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의 원본은 지금 프랑스의 파리 국민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록 혜초 자신이 8세기에 살아 있을 때 직접 친필로 쓴 사본이 아니고 9세기에 남의 손에 의해 베껴졌다 해도 우리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최고의 명작이요 최대의 보배임은 말 할 것도 없다.

17굴의조성과 발굴
돈황에서 발견이 있었다는 정보가 일본에 전달된 것은 메이지42(1909)1112일로 같은 날 도쿄와 오사카의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사가 실렸다.
돈황석굴 발견물
천년 전의 고서권 10여 상자
전부 프랑스인이 반출해감
칸다 기치로씨에 의하면 제목은 두 단이었고 기사는 석학인 나이토 코난이 썼다고 하는데 (돈황학 50), 이것이 일본에서 돈황학, 나아가 현재 일어난 실크로드 붐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스타인이 처음으로 돈황에 뛰어든 것은 1907년으로,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00년 당시 막고굴의 주지를 맡고 있던 도사 왕위앤루가 우연한 계기로 벽 안에 감춰진 17굴 장경동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연한 계기라는 것은, 오랫동안 쌓인 토사를 제거하고 있을 때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벽이 갈라졌는데, 왕위앤루가 불을 붙인 아편을 벽의 갈라진 틈 사이에 두었더니 연기가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미심쩍게 생각하여 두드리니 벽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광서28(1902), 감숙성 임학대의 시에창치는 당시 돈황현 지사 왕종한을 통해 장경동 출토의 문물 다수를 손에 넣었고, 전체 돈황문서를 예의주시했다. 그는 어석이라는 책 속에서 이들 문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장경동 출토의 전체 돈황문서를 감숙성도 난주로 이관, 보존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는 운반할 비용을 대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대로 왕위앤루(왕도사)가 보관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왕종한에 의해 정리연구가 진행되었으나, 보관을 왕위앤루에게 맡긴 것이 결국 스타인 등에게 유물을 넘기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17굴은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입구의 옆에는 ‘017’이라는 굴 번호의 표시가 있고 만당, 821/900 AD'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그 당나라 때의 굴 외벽, 16굴 용도의 벽화는 서하의 것이라는 점에 수수께끼가 숨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연구소 측정에 의하면 높이 180cm, 폭은 아랫부분이 92cm로 위쪽으로 가면 점차 좁아진다. 내부는 3m에 약간 못 미친다.
이렇게 작은 굴이 다른 큰 굴인 16굴에 이르는 용도 중간에 마치 부속물처럼 뚫려 있는 것이다.
중국 고대 분묘에는 주실에 이르는 묘도 좌우에 종종 이 같은 형식의 작은 방이 있어 그곳에 부장품을 둔다.
이곳을 이실이라 하므로 이 17굴은 이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막고굴에서는 이러한 이동의 다른 예를 볼 수 없다. 과연 이것은 역사의 수수께끼를 감추는 데 적합한 구조이다.
 
<17굴의 조성>
17굴의 수수께끼에 대해서는 언제 누가 어떠한 사정으로 금세기 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량의 서화와 경권을 여기에 보관했을까 하는 이른바 장경의 수수께끼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나, 이러한 구조를 보면 먼저 무엇 때문에 이러한 작은 굴이 만들어졌는가라는 의문이 앞선다.
최근 17굴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다른 장소에 있던 홍변이라는 승려의 상이 연구소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리고 이 홍변이야말로 17굴 조영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쥔 인물이다. 8세기 말에 있었던 유명한 안록산의 난에 의해 당 왕조의 영향력이 쇠하자 그 기회를 타고 남쪽에서 토번이 진격해와 돈황이 그 지배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돈황의 유명한 가문 장의조가 토번으로부터 토번을 물리치고 돈황을 수복한 것은 당 제16대 선종의 대중2(848)이었다.
장의조는 당 왕조에 전승 보고를 하려고 고승 홍변에게 의논했다.
홍변은 청을 받고 몇 명의 제자를 준비시켜 장안으로 보냈다.
그 몇 명은 도중에서 죽었으나 오진 등이 중5(851)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장안에서는 안사의 난도 수습되어 일단 안정을 보았다.
전승 보고에 기뻐한 선종은 장의조를 귀의군절도사로, 홍변을 하서도승통에 임명했다.
도승통모든 승려의 총령’, 말하자면 전자는 불교도장관이라는 것이 된다. 또한 홍변은 경성내외임단대덕’, 즉 장안 내외의 불교대사라는 칭호도 얻는다. 말하자면 제도상 불법상 최고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 된다.
홍변의 이러한 경력은 17굴 서쪽 벽에 끼여 있는 홍변고신칙첩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원래 17굴에 있었던 것을 왕위앤루가 굴을 열었을 때 16굴 용도 남벽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것을 다시 원래의 장소, 즉 현재 위치에 되돌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장경동 내에 홍변의 비가 있었으므로 이 굴이 홍변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의심함 여지가 없다. 또한 장경굴과 16굴의 위치 관계에서 본다면 장경동이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17굴을 막아버린 이유>
그러나 언제 누가 어떠한 이유로 경을 보관한 이 굴을 막아버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설과 하나의 이설이 있다.
하나는, 11세기 초 서하가 돈황을 정복하기 전 불전을 지키기 위해 성급히 봉했으며, 시기는 1034-1035년경이었다고 한다.
이 설은 펼리오 주장하는 설로 그 논거의 하나는 17굴의 서화경권 가운데 위 연대 이후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설은 다음과 같다.
10세기 말, 송 태조 때 카슈가르에서 일어난 카라칸 왕조가 군을 동으로 출전시키고 30년 전쟁 이후 서역불교의 중심지였던 호탄을 점령하였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카라칸 왕조는 호탄의 불교유적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거듭 군을 진격시켜 당시 돈황을 지배하고 있던 서하를 공격 점령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불교를 신봉하고 있던 서하가 거기에 대비해서 돈황의 불교도에게 경을 보관하도록 하고 굴을 봉하게 한 다음 그 위에 벽화를 그리게 한다.
그 시대는 송의 인종(당시 중국 중원은 송, 돈황을 포함한 서북지구는 서하가 지배하였다) 황우41054년이었다. 17굴을 밀봉하고 있던 16굴 용도의 벽화는 서하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그 보살상을 보고 있으면 이 설도 가능성 있는 듯이 보인다.
 
다른 한 가지 설은 장경동 자체가 페기물 창고였다는 설인데 장경동안에서 발견된 문서 중에는 완전한 장경이나 기타 진귀한 물품이 없을 뿐더러 대부분이 훼손된 장경이고 잘못 베껴 쓴 경전이나 덕지덕지 칠한 잡서까지 발견되고 기간이 지난 계약서 등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피난을 가면서 진귀한 문서를 감추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하찮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이미 실용가치를 상실한 문서라는 것이다.
즉 사경을 하다가 실수로 잘못 쓴 경전이나 닳아서 더 이상 보기가 어려운 경전, 그리고 필요 없는 문서를 폐기처분하면서 이것들은 따로 모아둘 창고가 필요했는데,
막고굴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석굴을 폐기물 창고로 이용했고 그곳이 바로 장경동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송대에 들어와서 막고굴 승려들은 불필요한 문서들을 폐기할 장소를 물색하면서 막고굴492개 굴 중 다른 곳은 크기에 관계없이 모두 불을 모신 법당이지만 유일하게 장경동만이 승려 개인의 기념굴이라 이곳을 폐기물창고로 쓰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 했던 것이다.
어쨌든 현재 장경동 문물은 내용의 풍부함과 가치의 진귀함으로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에게 각 방면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돈황석굴의 예술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 된 큰 공헌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