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장안(長安)
 
고도 장안(長安), 현재 서안(西安)이라 부르는 이 도시가 중국천하를 다스리던 수도(首都)로 군림하게 되기까지는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안의 동쪽 반파(半坡)라는 마을은 서안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지였는데, 위수 강가 황토의 단구(段丘)에 신석기(新石器)시대의 사람들이 건설한 계단식 마을은 1953년에 발견되어 1954년에서부터 1957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현재 이곳은 박물관으로 꾸며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반파에서 시작된 장인은 주()나라 때도 이 관중평야에서 세력을 키운 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청동기 시대 문화를 발달시키면서 다시 수도로 각광을 받는다.
주는 처음에 장안 서북쪽 주원(周原)을 수도로 삼았다가 다시 장안 서남쪽 근교인 풍()과 호경(鎬京)이라고 하는 곳으로 수도를 이전했는데 모두 장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안 근교라 할 수 있는 지점이다.
주원의 궁성 유지는 1976년 이래 계속 발굴되어 그 전모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갑골(甲骨) 15천 편, 십갑(十甲) 170, 동기 (銅器), 도기(陶器), 옥기(玉器) 등이 대량 출토되어 당시의 발달된 문화를 상당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풍경(灃京)과 호경(鎬京)의 궁성 유지는 대체적인 지역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지점은 아직 발굴되지 못하고 있는데 풍하(灃河) 양안(兩岸)에서 25리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풍경은 주()의 조선(祖先) 종묘(宗廟)를 모셔 제사지내던 곳이고, 호경은 정치 중심의 실제 수도였으며, 이 수도는 서주(西周)말 북방족의 침입으로 폐기하고 낙양으로 이전한 후 한동안 폐허 가 되었다.
그 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말기에 진()이 맥적산석굴이 있는 천수(天水)에서 일어나 이 곳 관중평야 서북 옹에 수도를 정하였고(B.C. 677),
그 후 B.C. 383년에 역양(櫟陽)으로 이전하였다가 B.C. 350년에 장안 근교인 함양(咸陽)으로 수도를 옮겼던 것이다.
함양은 현재 서안의 양안인 강남북에 걸쳐 조성된 도성으로,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후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이주시키고, 아방궁(阿房宮)을 건축하는 등 거대한 규모의 대도성(大都城)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의 서안 일대에 장안이 자리잡게 된 것은 한나라 때부터이며,
이때부터 이름도 명실공이 長安이라 했다.
한의 장안 (, 長安)은 현 서안시 서북 교외에 남으로 동수원(童水原)을 의지하고 북으로 위빈(渭濱)을 끼고 36라는 광활한 땅에 자리한 도성이다.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넓은 땅인데다 급수와 교통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홍수의 피해도 받지 않는 천혜의 대도성으로 적절한 곳이었다.
이러한 천혜의 땅에서 자손들이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란다(欲其子孫長安)’는 간절한 소망에서 長安이라 했다는 것이다.
 대안탑현장법사
 서안의 상징 대안탑
웅장한 장안의 규모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미도(美都)
 
 
성곽 둘레 36.7km, 면적 84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이 세계적인 대도성은 네모반듯한 성곽 안에 동북 등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북의 중심지에는 궁성과 황성(皇城)이 있는데 전면적의 1/9에 해당되고 이 외에는 동서로 나누어진다. 관청과 황성으로 들어가는문인 주작문(朱雀門)에서 남문(南門)인 명덕문(明德門)에 이르는 150m노폭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으로 동서에 걸쳐 동구와 서구로 나누어지며 주작대로 같은 노폭 150~170 m의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나 있다.
이에 따라 전시가지는 바둑판 같은 작은 방()으로 구획되는데, 110(=)으로 알려져 있다. 각 방은 각기 흙벽(土壁)으로 불러싸고 소형 성문인 동문을 내었는데 해가 지면 문은 닫혀지게 된다.
주작로의 동쪽인 동구(東區)와 서쪽인 서구(西區)는 행정과 치안, 그리고 주거생활로 일단 나누어지고 있다.
 
대도 장안의 번영도 안록산의 난에 이어 당말의 농민전쟁과 군벌의 발호로 황도로서의 기능이 사라지고 신성(新城, 907~1368)을 정비하여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옛 번성의 자취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던 듯 마르코 폴로(1254~1324)지극히 장려하고 아름답다고 장안성을 찬탄하고 있다.
오늘날 서안성은 명나라때 수축(1368)된 것을 기본으로 약간씩 손질되었는데, 이 성이 바탕이 되어 서안은 새로운 도시로서 번성을 누리고 있다.
 
향적사(香積寺)
 
향적사는 당나라 중종(中宗) 신룡(神龍) 2(706)淨土宗의 대찰로 중국 정토종을 대성한 선도 대사(善導大師)의 제자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 후 송나라 때 (太平興國 3,978)는 개찰사(開刹寺)로 개명 된 적이 있으나 오늘날은 옛 이름대로 부르고 있다.
대탑도 창건주 선도 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그 제자들이 건립하였는데 선도대사의 위업에 걸맞는 위용인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선도 대사(善導大師,613~681)는 정토종의 초조(初祖)인 도작(道綽, 562~645)의 제1제자로서 정토종의 요체를 저술하고 염불수행에 전념하였으며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는 등 당의 정토교를 대성한 고승이다. 그는 수도 장안의 자은사(慈恩寺) 등에서 적극적으로 교화활동을 펴 정토종 신앙을 크게 진작시켰다. 특히 나의 관심을 강하게 끈 것은 그가 정토변상도(淨土變相圖), 이른바 극락정토의 모습을 3백점이나 전심전력으로 그렸던 대화가라는 사실이다. 그가 그린 변상도는 이 절에도 틀립없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다만 짐작케 할 조각작품만이 간신히 전해지고 있다.
 향적사 향적사

흥교사
(興敎寺)
중국 최고의 역경승이자 유식학의 대가 현장스님과 양대 제자 윈측과 규기탑을 모신
사찰이다.
현장탑은 높이 21m나 되는 거대한 5층 전탑이다.
현장이 664(당고종린덕1(唐高宗麟德)에 입적하자 백록원(白鹿原)에 장사지냈다가 5년 후인 669년에 이곳으로 옮겨 탑을 세우고 절을 창건하였다.
따라서 이 사찰은 순전히 현장스님을 기념해서 창건한 셈이다.
현장탑은 좌우 두 탑과 더불어 넓은 평야와 그 너머 종남산을 멀리 마주하면서 산록에 우뚝 서 있다.
현장은 고구려 원정을 독려하기 위하여 낙양(洛陽)에 머물고 있던 황제 태종을 배알한 후 장안 홍복사(弘福寺)에서 번역사업에 착수하였으며,
648년 대자은사(大慈恩寺)를 창건하고, 여기서 번역사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741,335권이라는 엄청난 불경을 번역한 후 63세 때인 66425나는 반드시 미륵부처님 옆에 태어날 수 있을것이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태종의 이궁인 옥화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315일 그의 신구는 자은사 번경원(飜經院)으로 옮겨져 수많은 도속의 예배를 받은 후 백록원에 묻혔는데,
5년 후인 6694월 초파일 이곳 흥교사에 이 5층 전탑이 세워져 안장되었다.
 
왼쪽 탑은 우리의 원측법사탑(圓測 法師塔)이다.
원측 법사(613~696)는 신라의 왕실에서 태어나 15세 약관의 나이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안에서 오랫동안 여러 고승들에게 배워 대성한 원측은 현장이 귀국한 후 현장의 문하로 들어가 역경사업에 종사하였는데, 어학 실력이 남달랐던 그는 범어에 능통하여 유식학에 예리하고 참신한 능력을 가졌다.
측천무후 등 황실의 후원도 극진하여 황제의 명으로 자은사 부근 서명사(西明寺)에 주석하면서 역경과 학문, 그리고 교화에 진력하던 원측은 696년 향년 84세로 입적하게 된다.
그의 신구는 용문(龍門) 향산사에서 다비하여 백탑(白塔)에 봉안되었고, 또한 분골(分骨)되어 종남산 풍덕사(豊德寺) 동쪽 언덕에도 탑이 세워졌는데,
송나라 때인 1115년에 다시 분골되어 이곳 현장탑 왼쪽에 배탑(配塔)된 것이다.
오른쪽 탑은 그의 제1고제(高弟) 규기(窺基)대사의 묘탑(廟塔)으로 아담한 3층탑이다.
규기(632~682)는 장안 출신으로 대자은사에서 현장에게 사사, 현장의 문하에서 역경에 종사하면서 현장의 유식 법상종(唯識法相宗)을 널리 전교하여 중국 최대의 종단으로 발전시켰던 대학승이었다.
그는 51(682)때 자은사에서 입적하여 흥교사 현장탑에 배장되었는데, 828년에 문인 금검(今撿)에 의하여 다비된 후 이 탑이 세워졌다.
흥교사 현장법사사리탑과 원측&규기법사사리탑
흥교사 와 현장법사와 원측법사&규기법사 사리탑

대자은사
(大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
 
대 자은사와 대안탑은 당대(唐大)의 영광과 번영의 상징이다.
불상과 아름다운 唐代石址(당대석지)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당시를 대표할 만한 수작들이다.
특히 석불대좌에는 大唐龍朔(대당용삭)二年三藏(이년삼장)法師玄奘(법사현장)敬造釋迦(경조석가)佛像供養(불상공양)”이라는 520자의 조성기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680년 현장법사가 석가불상을 조성했던 석가불 대좌이다.
현장 스님의 공양을 받던 이 대좌에 서린 법음(法音)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대자은사에서 당나라때의 번성과 영광을 한눈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대자은사 7층 전탑, 대안탑(大雁塔)이다.
 
현재의 탑은 높이 64m에 기단의 길이 약 41.5m(높이 4.5m), 1층은 한변의 길이가 25m인데 층수가 높아질수록 약간씩 체감되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각 측의 탑신에는 탱주가 1층부터 7층까지 8866444
개씩 배치되었고, 두공첩차까지 치레하였으며, 서까래와 여러겹의 옥개받침도 표현하여 현장탑과 비슷하면서도 더 한층 장엄한 편이다.
뿐만 아니라 각 층 사면마다 문을 내어 밖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장안성의 위용은 어떠했을까.
1층 서쪽 출입구 위 미석(楣石)에는 불전도(佛傳圖)를 선각으로 새겨 당의 건축양식을 잘 알 수 있게 하는데 당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알수 있게 한다.
1층 남쪽 출입구의 좌우 벽에는 태종이 내린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와 황태자시절의 고종이 기술한 술성기명(述聖記銘)을 각각 감입(坎入)했는데, 당대의 명필이자 명재상이던 저수량(楮遂良)이 쓴 글씨(刻字)로 더욱 유명하다.
 
이 탑은 652년에 5층으로 건립되어 현장이 가져온 불경과 불상이 안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훼손되자 701년에 7층으로 개축되었다.
그 후 5(五代 長興年間;930~933) 때 새로 단장되었고, , , 청의 중수를 거쳐 최근에도 내부 개조단장을 한 후 현재의 모습에 이른 것이다.
개축시 7층이라는 설도 있고, 10층이라는 설도 있지만 8세기의 저명한 시인 잠삼(岑滲;715~770)의 자은 사탑을 노래한 시()에 보면 7층이 분명한 것 같다.